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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부자들의 ‘식초’

<조선일보>강경희 논설위원 입력 2020.10.20


값싼 시칠리아 와인을 이탈리아 고급 와인 사시카이아로 둔갑시켜 러시아, 중국, 한국 등에 팔려던 이탈리아 사기꾼 부자(父子)가 지난주 이탈리아 경찰에게 체포됐다. '한국의 ‘와알못’(와인 맛을 잘 알지 못하는) 부자들이 봉 될 뻔했다. 이탈리아 경찰 도청 기록에는 “꽤 괜찮다. 하지만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팔아야 한다”고 와인 사기꾼들이 나눈 대화가 남아있다.



▶중국 등 아시아 신흥 부자들이 고급 와인을 즐겨 마시면서 와인 값이 치솟자 짝퉁 와인도 덩달아 기승을 부린다. 위조품은 부자들이 즐겨 찾는 몇몇 고급 와인에 집중되는데, 사시카이아도 그중 하나다. 10여 년 전엔 이탈리아의 한 지방 창고에서 연간 사시카이아 생산량의 12%에 해당하는 위조품 2만병이 적발된 적도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10병 중 1병만 진짜라는 얘기도 있다. 프랑스 와인 전문가는 “내가 알기로 1945년산 로마네 콩티는 600병뿐인데 와인 경매에서 내가 본 것만 해도 수천 병”이라고 했다.


▶1985년 크리스티 경매에 하디 로덴스탁이라는 독일인 와인 딜러가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그랑크뤼 1등급 ‘샤토 라피트 로칠드’ 1787년산을 내놨다. 파리의 재건축 현장에서 벽을 뜯던 인부들이 발견했다면서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 시절 수집한 와인이라고 했다. 와인 병에 ‘Th. J’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머리글자도 있었다. 예상가의 5배가 넘는 15만6000달러에 낙찰됐다. 미국의 억만장자 와인 수집가도 이 와인을 50만달러에 4병이나 샀다. 20년 뒤 와인은 위조로 판명 났다. 한 논픽션 작가는 이 와인을 ‘억만장자의 식초’라고 했다.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 로마네 콩티를 좋아해 ‘닥터 콩티’라는 별명이 붙어있던 세기의 와인 사기범이 8년 전 미국서 체포됐다. 30대 나이에 고급 브랜드 정장으로 휘감고 값비싼 시계를 차고 페라리를 몰고 와인 경매장을 들락거리던 인도네시아 화교 태생의 루디 쿠니아완은 미국의 유명 와인 잡지에까지 소개됐다. 와인 수집가로 명성을 쌓은 뒤 자신이 가진 와인을 팔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기 집에서 위조한 짝퉁들이었다.


▶와인은 어떤 토양에서, 어느 해에 생산됐느냐에 따라 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맛이 제각각인 ‘다양성’의 상징이다. 내 형편에 맞는 와인을 골라 마음 맞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마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와인이다. 허영심을 노리는 짝퉁 와인 뉴스에 와인의 가치를 새삼 곱씹어보게 된다.

강경희 논설위원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0/10/20/ZAGQLXX2RNDYLNX3PN7UFRWD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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